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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 특수부대 실미도의 진상

버들뫼 2007. 8. 25. 18:01

 

 

[실미도의 진실] 분단의 희생양 북파공작원
지워진,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HID·UDU·OSI 1951년 이후 1만 3000여명 양성 <<펌>>


영화 ‘실미도’ 흥행을 계기로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북파 공작원’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들은 1971년 8월 23일 서울 노량진에서 폭사한 실미도 부대원들 때문에 몸체 일부를 세상밖으로 드러났지만 이내 반공이데올로기에 묻혀야 했다. 그러다 30여년이 지난 2002년 3월과 9월 서울 도심에서 LP 가스통에 불을 붙이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여 잠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후 갖가지 사회적 이슈에 밀려 나 있던 북파공작원이란 존재를 성큼 현실화시켰던 건 2003년 12월 영화 ‘실미도’의 개봉이었다. 아울러 그들을 위한 두개의 특별법(특수임무유공자보상(예우)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하면서, 그들의 존재는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1948년경 태동, 51년 이후 독자 운영

북파공작원은 본래 한국전쟁중인 1952년부터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 발표때까지 북한 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한 무장 첩보원을 말한다. 그러나 북파공작원은 남북이 사실상 분단된 1948년경부터 존재했고, 최근 이들에 관한 특별법도 ‘1948년 8월15일부터 1994년 12월31일 사이에 특수임무의 수행을 위하여 파견되었거나 이와 관련한 교육 훈련을 받은 자’로 규정해 북파공작원 범위를 합리적으로 확대했다.

정부 수립 이후 1950년 초반까지의 북파공작원은 주로 미군에 배속돼 활동했다. 미 극동사령부 산하의 켈로부대(KLO)· 합동정찰대(CCRAK)· 6004항공첩보대와 미 CIA 조직인 OSO· OPC 첩보부대가 대표적.

켈로부대는 1948년 주로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북 출신을 중심으로 창설됐는데 고트(Goat, 대장 최규봉), 선(Sun, 대장 전훈), 위스키(Whiskey, 대장 박태현) 등 3개 지대로 나뉘어 활동했다. 1950년 9월 팔미도등대를 점령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부대다. 한편 CIA가 주도한 OSO는 스파이에 의한 첩보활동을, OPC는 비밀공작을 주로 담당했는데 나중에 JACK로 통합됐다. 남과 북에 기지를 두었던 OPC부대는 휴전 협정 이후에도 첩보 활동을 계속했다.

한편 한국군은 육·해·공군별로 첩보 부대를 운영했다. 육군 첩보부대는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해군 첩보부대는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 공군 첩보부대는 OSI(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 등으로 불려졌는데, 바로 이곳에서 북파공작원이 양성됐다.

육군의 HID(1951년 3월 창설)는 규모 면에서 가장 컸고, 해군의 UDU는 6·25전쟁 전인 1949년 6월 창설돼 가장 오래된 북파공작대란 기록을 갖고 있다. 가장 강력한 북파 공작은 북한 내부에 깊숙이 침투하는 공군의 OSI에게 할당됐다.

이 가운데 북파공작원 대다수는 HID 출신으로, 그 중에서도 1952년 10월께 서울 정릉 청수장에 설립된 제1교육대가 가장 규모가 컸다. 당시 HID 부대장은 이철희· 장영자 사건으로 유명한 이철희 대령이었고, 교육대장은 김종벽 소령이었다. 제1교육대는 53년 3월까지 3차례에 걸쳐 모두 800여명의 공작원을 훈련시켜 북파 무장 활동에 투입됐다. 이들 중 살아 남은 1기생 다수와 2기생 170명, 잔류병 등을 더한 300여명이 종전을 10일쯤 앞둔 53년 7월 중순께 함경도 앞바다 여도에 투입돼 원산 상륙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100여명이 사망했다.

종전후 HID 생존자는 재교육에 들어가 54년 3월부터 군번도, 계급도 없는 ‘민간인’ 신분으로 북파됐다. HID는 60년대 말 AIU(Army Intelligence Unit)라는 이름과 혼용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군ㆍ민간인 출신으로 구분

북파공작원은 크게 군과 민간인 출신으로 구분되는데 군 출신은 사병 생활을 하다가 특수요원 모집에 응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민간인 출신은 특전사나 해병대 등 특수부대에 지원할 생각으로 병무청 등을 방문했다가 특수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또한 북파공작대에서 나온 물색조가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을 선별하거나 직접 외부에서 ‘특별 보상’를 내세워 공작원을 모집하기도 했다. 50년대 초에는 구월산 유격대 등 월남한 이북 출신들이 많았지만 이후에는 남한 출신 북파공작원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북파공작원의 전체 규모나 생사 여부는 아직 베일에 싸여 있다. 71년 실미도부대원의 자폭과 2002년 서울 한복판에서의 시위는 강요된 침묵속에서 역사의 희생양에 머물러야 했던 북파공작원의 자화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국군정보사령부가 지난해 9월 21일 국회 국방위 소속 한나라당 이경재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51년 육군첩보부대(HID)를 창설한 뒤 94년까지 양성된 북파공작원은 1만3,000여명이며, 이 기간 중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는 7,800여명, 부상자는 200여명이고 나머지는 생사여부 등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 51년 이전 미군에 배속돼 활동한 북파공작원까지 포함할 경우 희생자 규모는 훨씬 커진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보상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북파공작원은 보통 3년 또는 4년 기간을 정해 채용됐고 상당한 보상과 보장을 약속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생존자는 대부분 비밀 유지 각서를 쓴 뒤 해고됐다. 특히 민간인 출신 북파공작원은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재입대되거나 병역기피자로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었다.또 ‘인간 병기’로 돼가는 과장에서 심신이 피폐해져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61년부터 30여회 북파공작을 한 김수찬(67)씨는 현재 후유증으로 충남 당진의 야산에서 혼자 움막 생활을 하고 있고 설악산부대 출신으로 70년초 북파공작을 한 박모(59)씨와 노모(58)씨는 사회 적응이 안돼 건달 생활을 하다 전과 기록만 늘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명예회복 요구

미군 소속 북파공작원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50년부터 56년까지 미군이 훈련시켜 북한에 투입한 공작원은 모두 3,000여명으로 대다수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들에 대한 기록은 국내에 전무해 미국쪽에 자료 요청을 해야 할 상황이다. 북파공작원과 유족들은 그 동안 간간이 생존확인 및 명예 회복을 요구했지만 93년께 광주민주화운동 보상 요구가 터져 나오자, 시대적 분위기를 타고 조직적인 대응에 나섰다. 대북참전 국가유공자 연대(대표 박부서), 북파공작원 유족동지회(회장 하태준), 북파요원 추모사업 전우회(회장 김정식), 북파공작 특수임무 동지회 전국연합(대표 이동안) 등이 대표적.

현재 김성호 열린우리당 의원이 북파공작원과 유족들의 뜻을 모아 발의한 ‘특수임무유공자보상에 관한 법률안’은 지난해 12월30일 국회 국방위를 통과하고 법사위에 계류돼 있다. 이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해 효력을 발휘하게 되면 정부는 최고 2억4,000만원(북파돼 임무 수행 중 전사자)까지의 보상금을 북파공작원 출신 인사나 그 유족에게 지불해야 한다. 그 동안 ‘잊혀진 존재’로 치부됐던 북파공작원이 온전히 명예를 회복해 역사의 무대에 다시 서게 될 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종진 jj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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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실미도가 무기수출신으로 구성된 것과 실제는 다르다. 실미도출신중 범죄인은 한명도 없는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실미도와 비슷한 시기 육군에서 운영되었다 해체된 선갑도 부대는 교도소 출신으로 공식구성된 유일한 공작부대였음이 알려져 있다. 또 한가지 공작원중에는 여자도 있었다는 것. 실제 LG에 근무하던 직장인을 포섭한 사례를 비롯 민간인 포섭사례도 상당수 알려져 있다.

북파간첩 그분들은 정말 애국심에 똘똘 뭉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인병기로 재탄생해야 했던 분들이다. 그 분들이 사회에 돌아갔을 때 돌아간것은 무관심과 싸늘한 냉대와 멸시, 그리고 범죄인이나 폭력배일거라는 따가운 시선마저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는 연금이나 보상은 커녕 안기부등의 감시나 향군법 위반등으로 취업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94년까지 공작원을 북파한 것으로 발표되었으나, 지금은 과연 북파간첩이 없을지에 대해서도 강한 의문이 든다. 우선 지금도 남한내에 남파간첩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미군이 이라크 침공 직전 수천명의 스파이를 잠입한 사례나, 또 최근에도 GOP 근무자들의 북파사례를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 때 뉴스를 통해 알려졌듯 철책을 뚫고 월북한 민간인 기사에서 보듯 상식적으로 민간인이 철책과 삼엄한 경비를 뚫고 지뢰밭을 헤쳐나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북파간첩인지 남파간첩의 월북통로였는지...).

남파간첩이 국가인권위에 의해서 민주화인사로 추앙받는 시대에, 가스통을 들고 자살특공대를 조직하겠다며 거센 항의시위를 했어여 했던 그분들의 심정은 그만큼 절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6.25당시의 유해송환이나 북에 생존자가 남아 있음이 확인되는 상황인데 북파공작원중에도 생존자가 분명 남아 있을 것인데 정부로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미온적이서는 안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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